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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밝히는 이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단편 소설

by Daisy_On 2020. 7. 1.

 

 

 

 

얼마 전 공상과학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을 너무 재밌게 봤었다.

반납하고 책을 빌리려고 도서관에 갔는데 이 책에 눈에 띄었다.

이것도 뭔가 비슷한 느낌일 것 같은 과학 소설 뉘앙스를 풍기는 책이라 빌려왔다.

책 뒤에는 "현대 미국 단편 문학의 가장 빛나는 성취" 라고 쓰여있고 다른 소설가들의 평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한껏 기대를 안고 독서 시작!

 


앞의 두 단편 소설을 읽었을 때, 그닥 내 스타일이 아니라 책을 접을까 했다.

첫 이야기는 어렸을 적 (불법)맨홀에 빠져 죽은 친구 이야기였다.

내가 아직 이 책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한건지 이 이야기에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뭔지 잘 안느껴졌고, 마지막에 이야기가 끝난 느낌이 안들어서 다음 소설이 이어지는 내용인 줄 알았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영화촬영으로 바쁜 아빠가 장기로 집을 비우는 사이 엄마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부모님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람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그래서 책장을 넘겨 이 책의 제목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만 읽기로 했다.

 

물리학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냈는데, 짧은 방정식 하나만 쓰여있었다.

이 이야기는 답안지를 제출한 유일한 학생인 헤더와 교수 로버트의 이야기이다.

노골적이지 않았지만 둘은 천천히 사제지간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고, 헤더는 남자친구 콜린이 있었다.

교수가 서른 살이나 많았기에 처음에 헤더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고, 교수의 아파트에서만 만나던 둘은 바깥에 술을 마시러 갔다가 헤더의 남자친구 콜린과 마주치게된다.

헤더와 콜린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으며, 콜린은 헤더에게 더이상 교수와 만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그 바람을 눈감아준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을 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p.125~126

헤더와 콜린은 결혼하고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는 듯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우연히 교수 로버트의 죽음을 들은 헤더의 반응을 보고 콜린은 그 날 헤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더는 그제서야 서서히 콜린과의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헤더는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와 바람을 피웠고, 그 사실을 숨긴 이유를 '진실을 밝히는 것은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고 결국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다' 라고 변명하고있다.

당연히 베스트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 일테지만, 이미 저질러진 후에는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인 것 같다.

나는 보통은 솔직한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을 보니 솔직한 게 마냥 정답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이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함인 것 같다는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 굳이 화내지 않는 것이 더 그 사람이 벌 받는 길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이 문제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헤더의 말이 변명으로밖에 안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상황에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도록 숨기는 거라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잘못을 한 상태에서는 '선의'라고 할 수 없다.

헤더의 말은 누군가에게는 개소리로, 누군가에게는 진리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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